A
6월 민주 항쟁 이후 민주화 과정 · 10한사2-03-01 · 5문항
문제 110한사2-03-01객관식
다음 사료가 나오게 된 배경과 그 성격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첫째,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인 정부 이양을 실현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 둘째,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의 변경뿐만 아니라 이의 민주적 실천을 위하여서는,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 노태우 민정당 대표 「6·29 선언」, 1987년 6월 29일
본문은 이 선언을 여당 후보의 항복 선언이라 하면서, 직선제 개헌·김대중 사면 복권·언론 자유·지방자치 실시 등 8개항이 거리의 시민들이 강제한 결과물이었다고 정리합니다. 발표 주체가 집권 여당(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였고 내용이 직선제 수용이므로 ③이 맞습니다. ①은 선언의 내용과 정반대이고, ②의 3당 합당(1990, 민자당)은 여당과 두 야당이 합쳐 야권의 견제력이 약화된 1990년의 별개의 일이라 시기와 내용이 모두 어긋나며, 5공 청문회는 1988~89년 국회에서 따로 열린 일이라 ④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문제 210한사2-03-01객관식
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해체와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 공통으로 지향한 바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본문은 하나회 해체를 군의 정치 개입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차단한 핵심 조치로, 5·18 특별법을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는다"는 원칙이 확립된 역사적 순간으로 설명합니다. 두 조치는 모두 군부 통치가 남긴 유산을 정리하고 그 책임을 사후에 묻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②가 맞습니다. ①은 같은 정부의 금융실명제, ③은 1995년 지방자치 전면 실시, ④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에 해당하는 설명으로, 모두 군부 유산 청산이라는 공통 지향과는 초점이 다릅니다.
문제 310한사2-03-01객관식
다음 활동들이 공통으로 보여 주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로 가장 적절한 것은?
소액 주주 운동(재벌 총수 견제) · 낙선 운동(2000 총선시민연대의 부적격 후보 낙선 운동) · 정보 공개 청구 · 공익 소송과 행정 소송
본문은 경실련(1989)·환경운동연합(1993)·참여연대(1994) 등이 입법 청원, 정보 공개 청구, 공익 소송, 캠페인 등 제도적 수단을 적극 활용하며 정부·기업·언론을 견제하였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소액 주주 운동, 낙선 운동, 정보 공개 청구, 행정 소송 등 다양한 시민 참여 방식이 제도화되었다고 정리합니다. 이는 정치 무대 바깥에서 시민이 만들어 낸 또 다른 민주주의의 영역이므로 ①이 맞습니다. ②는 이 견제의 주체가 정당이 아니라 시민 단체였다는 서술과 어긋나고, ③은 6월 항쟁 직후의 노동자 대투쟁으로 민주노조가 자라나 민주노총(1995)의 뿌리가 되었다는 서술과 반대이며, ④는 1995년 지방자치가 전면 실시되고 이후 주민조례·주민투표 등 직접 참여 제도가 정비되었다는 서술과 맞지 않습니다.
문제 410한사2-03-01객관식
2004년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과 2016~17년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비교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본문에 따르면 2004년 3월에는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소추가 의결되었지만 5월에 헌법재판소가 기각하여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하였고, 2017년 3월 10일에는 헌법재판소가 전원일치 인용으로 파면을 확정하였습니다. 결론은 달랐지만 두 사건 모두 국회 소추 → 헌법재판소 판단이라는 같은 절차를 따랐으므로 ④가 맞습니다. 결과가 갈렸으므로 ①·②는 성립하지 않고, 2004년 탄핵은 촛불집회가 소추를 이끌어 낸 경우가 아니므로 ③도 옳지 않습니다.
문제 510한사2-03-01분류
다음 정책과 사건을 그것이 이루어진 정부별로 알맞은 칸에 넣어 보세요.
항목을 누른 뒤 넣을 칸을 누르면 들어가요. 칸에 든 것을 누르고 위 ‘보기’ 칸을 누르면 다시 꺼낼 수 있어요.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노태우 정부는 사회주의권 붕괴를 배경으로 1990년 소련(한·소 수교), 1992년 중국(한·중 수교)과 외교 관계를 맺었고, 국내에서는 5공 청문회(1988~89)가 열렸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1993년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단행하고 1995년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하였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국가인권위원회 설치(2001) 등 인권 제도화를 이루었고, 2000년 6월 평양에서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열었습니다.
B
외환 위기의 극복과 사회·문화 변동 · 10한사2-03-02 · 4문항
문제 610한사2-03-02객관식
1997년 외환 위기의 국내적 배경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본문은 1990년대 중반 30대 재벌 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은 약 400%에 달했다고 하며, 이것이 대마불사 신화에 기댄 무리한 차입 경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자본금의 네 배에 이르는 빚으로 몸집을 불린 구조가 위기의 국내적 뿌리이므로 ①이 맞습니다. ②는 정부가 오히려 부실 기업의 구조조정을 미뤄 왔다는 본문 서술과 정반대이고, ③의 2,000억 달러 외환 보유고는 2008년 금융 위기를 견딘 조건이며(1997년 11월에는 39억 달러까지 떨어졌습니다), ④의 비정규직 확대는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위기 이후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문제 710한사2-03-02객관식
1998년의 금모으기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본문은 금모으기로 모인 금액이 IMF 차입금 195억 달러의 약 11%에 불과했지만, 국제 사회에 한국 국민의 위기 극복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효과가 매우 컸다고 평가합니다. 따라서 모인 금만으로 차입금을 전액 갚을 수 있었다는 ③은 사실과 다릅니다. ①·②는 참여 인원과 분량에 관한 본문 서술 그대로이고, ④는 본문이 소개한 비판적 시각(원인 제공자에 대한 면죄부, 동원 방식에 대한 비판 등)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제 810한사2-03-02객관식
1998년 2월 노사정 합의로 도입된 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가 한국 사회에 남긴 결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본문은 두 제도의 도입 이후 기업이 정규직 채용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빠르게 늘려 같은 업무, 같은 시간, 다른 신분이라는 노동의 이중 구조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 갈등이 되었다고 설명하므로 ②가 맞습니다. ①은 위기 이후 오히려 공무원·공기업 선호가 커져 9급 경쟁률이 치솟았다는 서술과 어긋나고, ③은 부채비율이 100%대로 낮아졌다는 정리와 반대이며, ④도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이 OECD 평균(약 17%)보다 높은 20~25%를 유지했다는 서술과 맞지 않습니다.
문제 910한사2-03-02OX 판단
다음 설명은 옳을까요?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에 그늘만 남긴 것이 아니었다. 위기를 통과하는 동안 벤처·인터넷 붐과 한류의 해외 진출,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이 함께 나타나, 2023년 한류 콘텐츠 수출액은 약 132억 달러에 이르고 2024년 국내 체류 외국인은 약 251만 명(총인구의 약 5%)이 되었다.
옳습니다. 본문은 위기는 변화의 압력이기도 했다고 하면서,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벤처·인터넷 붐, 한류의 글로벌화,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동시에 통과했다고 정리합니다. 「사랑이 뭐길래」(1997, 중국 CCTV)에서 시작된 한류는 강남스타일(2012)과 BTS의 빌보드 200 1위(2018)를 거쳐 2023년 수출액 약 132억 달러에 이르렀고, 체류 외국인은 2024년 약 251만 명으로 총인구의 약 5%를 차지하게 되어 "단일민족"이라는 자기 이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C
한반도 분단 극복과 동아시아의 평화 · 10한사2-03-03 · 4문항
문제 1010한사2-03-03객관식
다음 합의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 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 「7·4 남북공동성명」, 1972년 7월 4일
본문은 7·4 남북공동성명을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합의 문서로, 여기 담긴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이 이후 모든 남북 합의문의 기본 틀이 되었다고 설명하므로 ④가 맞습니다. ①은 이 성명이 두 정상의 만남이 아니라 이후락·박성철의 비공식 접촉으로 합의된 것이라 옳지 않고, ②의 완전한 비핵화 문구는 2018년 판문점 선언의 내용이며, ③은 1991년 12월 13일 채택된 남북 기본 합의서에 대한 설명이라 1972년의 이 성명과는 다른 문서입니다.
문제 1110한사2-03-03객관식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에 나타난 변화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본문은 남북의 UN 동시 가입을 1991년 9월 17일의 일로, 곧 냉전 종식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일로 서술합니다. 2000년 6·15 선언보다 아홉 해나 앞선 사건이므로 그 '이후의 변화'로 볼 수 없어 ②가 답입니다. ①·③·④는 모두 본문이 6·15 선언의 결과로 든 것으로, 금강산 관광(1998 시작, 정상회담 이후 활성화), 개성공단(2003 착공, 2004 가동), 이산가족 상봉(2000~2018, 총 21차례)이 그것입니다.
문제 1210한사2-03-03객관식
다음 칙령의 석도(石島)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제1조.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야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하야 관제(官制) 중에 편입하고, 군등(郡等)은 5등으로 할 사.
제2조. 군청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할 사.
— 『관보』 제1716호, 「칙령 제41호」, 광무 4년(1900) 10월 27일
본문은 칙령 제41호의 "석도(石島)"가 바로 독도이며, 울릉도 주민이 부르던 우리말 이름 "독섬"(돌섬)을 한자로 옮긴 것이 석도, 음을 빌린 것이 독도(獨島)라고 설명하므로 ①이 맞습니다. 칙령 제2조는 죽도와 석도를 나란히 적어 서로 다른 섬임을 보이므로 ②는 옳지 않고, ③은 본문이 독도를 울릉도에서는 바라볼 수 있으나 일본 오키 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밝힌 것과 어긋날뿐더러 석도는 우리말 이름에서 온 표기이므로 성립하지 않으며, ④의 무릉은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울릉도를 가리키는 이름(우산이 독도)이므로 석도와는 다릅니다.
문제 1310한사2-03-03OX 판단
다음 설명은 옳을까요?
『속일본기』에 실린 727년 발해 무왕의 국서에는 "고려(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잇는다"는 구절이 있다. 이 기록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소수민족의 지방 정권으로 보는 동북공정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인다.
틀립니다. 본문은 동북공정의 주장이 ① 고구려가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른 독자적 고대 국가였고, ②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자임했으며, ③ 발해 무왕이 일본에 "고려(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잇는다"고 명시한 사실(『속일본기』 727년 기록)을 무시한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곧 이 국서는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아니라 그 주장을 반박하는 대표적 근거입니다. 한국 정부도 2004년 고구려연구재단(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통합)을 세워 이러한 학술적 대응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
평가 완료!
0 / 13 문항